차라리 적개심에 불타오르는 투사가 되라
이성규 - 다큐멘터리 감독(독립PD)
"그분들은 이미 노동자가 아니라 적개심에 불타는 투사입니다." 10월 17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기륭전자의 배명훈 대표이사가 한 말이다. 2005년 당시 기륭전자엔 500명의 사원 중 생산직 사원이 300여명 정도이고, 이 가운데 정규직 사원이 10명, 계약직 사원이 30∼40명, 나머지 250여명의 노동자가 파견직이었다. 당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법정 최저임금보다 불과 10원이 많은 64만1850원을 받았고 한 달에 70∼100시간의 잔업을 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투사가 됐다. 그것도 적개심에 불타는 투사.
기륭전자 대표이사 입장에서 본다면, 3년이나 이어지고 있는 이번 사태가 얼마나 황당할까. 최저시급으로 일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도대체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3년동안이나 싸우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 못할 것이다. 돈이나 몇 푼 받고 떨어지면 좋을 것을 끈덕지게 노조원 중 복직 희망자 전원에 대한 정규직화(그래봐야 30여명이다)를 요구하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 불능이다. 적개심에 불타는 투사로 몰아부치는 게,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최대 한계인지도 모른다.
적개심에 불타는 투사와 맞서는 상주용역 30명의 일당이 하루 25만원에서 35만원정도로 알려져있다. 생산 노동자로 일하는 것보다 노동자와 맞서는 용역으로서의 직업이 훨씬 더 돈이 된다. 시급으로 치면 7~8배 차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륭전자는 돈이 많은 회사다. 하루에 거의 1천만원씩이나 되는 거금을 상주용역에 지불하고 있으니 말이다. 기륭전자 배명훈 대표이사는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버티고 있을까? 개별기업의 이득보다 비정규직이 필요하다는 전체 자본가의 대의를 생각하며 손실을 감수하겠다는 것일까?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해 투사가 되었다면, 기륭전자 경영진을 이념형 투사로 지칭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지난 10월 7일 “최저임금이 우리 경제 수준에 비해 가파르게 올라갔다”며 최저임금제도를 손질할 의사를 내비친 바 있다. 최저임금제는 국가가 노동자 임금의 최저수준을 정하고, 사용자가 그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제도다. 저임금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취지로 1988년부터 시행됐다. 올해 최저임금은 시급 기준 3770원이고, 내년 최저임금은 4000원이다. 여기서 수학의 사칙연산을 해보자. 요즘 일주일에 5일 일하니까, 한 달이면 약 22일 가량이 실제 노동일수다. 하루 8시간 노동한다고 치면, 8*3770원=30160원. 즉 이게 하루 일당이다. 이걸 한 달로 계산하면 30160*22=663,520원이다. 이렇다면 우석훈 박사가 쓴 <88만원 세대>는 고액의 월급을 받는 세대가 된다. 기륭전자의 경영진을 대표선수로 내세우고 있는 이념형 투사인 한국의 자본가들이 원하는 세상은 바로 이런 것이다.
여의도 방송가에서 3년차 독립PD의 주당 노동시간은 거의 80시간에 이른다. 이들의 월급은 120만원을 결코 넘지 못한다. 시급으로 치면 3천4백원도 안된다. 정부가 고시한 최저임금에도 못미친다. 술 한잔 나누며 허튼 불만을 쏟아놓을뿐, 노동자 처우에 대한 그 어떤 조직도 없고 저항 조차 하지 못하는 노예신분에 다름 없는 노동자가 바로 독립PD다. ‘적개심에 불타는 투사’의 호칭을 듣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오히려 부럽게 느껴지는 것은 경박한 환타지일까? 여의도의 독립PD는 결코 정규직을 꿈꾸지 않는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커녕, 그 절반의 임금이라도 받는 세상을 꿈꿀 뿐이다.
한국의 자본가들은, 청와대와 국정원과 경총을 동원한 것에서 보이듯, 이미 기륭투쟁을 한 사업장의 문제로 보지 않고 한국 사회의 시스템을 재조정하는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부르주아들은 단합했는데 프롤레타리아트는 분열한다. 우리는 기륭 투쟁의 정치성을 깨닫고 한 사회의 지배계급 그 자체의 최소한의 양보를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투쟁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에게 진심으로 동지애적 지지를 보낸다. - 죽어도 비정규직 방송 연출자일 수 밖에 없는 여의도의 한 독립PD가....
-'PD저널'에 기고한 글
PS : 윗글을 쓴 것은 지난 월요일 새벽이다. 쓰자마자 송고를 했다. 이후 비정규직에 대한 기사 검색을 하다가, 울산의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외면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의 규약변경안이 세번째 부결되면서 또 다시 실패한 것이다. 1사 1조직 원칙 아래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강조해 온 금속노조의 노력이 현대자동차 정규직에겐 통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에는 정규직이 4만5000여 명, 비정규직이 1만5000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이 가운데 1, 2, 3차 협력사 비정규직이 1만2000명, 식당·청소·경비 등 시설관리 비정규직이 3000여 명 수준이다. 이들 1만5000명은 지난해 1월과 6월, 두 차례의 부결에 이어 다시 한 번 정규직 노동자들의 '외면'을 바라봐야했다.
여기에는 정규직 노동자의 '밥 그릇 지키기' 심리가 이미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비정규직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일 경우, 매년 임단협 때마다 이들의 처우 개선 문제가 정규직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가 존재하는 것이다. 최근의 경제위기도 한 몫을 했다. 또 규약 변경이 "힘든 일은 비정규직, 쉬운 일은 정규직이 한다"는 완성차 업계의 악습에 제동을 걸까 염려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지금 여의도가 그렇다. 방송사의 정규직은 정권의 방송장악저지 투쟁에 독립PD의 연대를 요청하지만, 그것은 일면 숫자 동원 혹은 명분확보에 있을 뿐이란 의도가 엿보인다. 물론 그들 지도부의 순수성을 의심하진 않는다. 적자경영이란 비난을 받으면서 물러나게된 정연주 체제 자리에 이병순 체제가 들어섰다. KBS의 이병순 사장은 정연주를 공격했던 패러다임인 적자경영을 벗어나기 위해, 온갖 애를 쓰고 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외주제작사부터 치려하고 있다. 정연주 사장이 삭감한 제작비 30% 삭감에 이어 이병순 사장은 거기서 10%의 삭감을 시도하려한다. 또한 제작사의 협찬금 가운데 50%를 KBS의 수익으로 설정하려든다. 허나 내부에선 이런 것에 대한 비판 기조가 전혀없다. 자신들의 밥그릇만 지키면 된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노노간의 갈등은 오히려 자본가를 돕는다는 견해에 일정 공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다. 그러한 구조를 만들어 낸 것은 신자유주의 추종자인 자본가들이다. 허나 이제 나의 계급적 적개심은 같은 노동자인 정규직으로 향한다. 물론 그 적개심의 대상을 정규직 노동자로 설정하는 게 올바른가 하는 고민이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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